자동차의 얼굴이 ‘눈’에서 ‘빛’으로 바뀌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동차의 전면부는 좌우의 두 개 헤드라이트가 인상을 결정했다. 그러나 최근 출시되는 차량들을 보면, 그 전통적인 ‘눈’은 사라지고 대신 얇고 길게 뻗은 LED 주간주행등(DRL)이 전면 상단을 차지한다. 실제 주행용 램프는 범퍼 하단에 숨겨져 있고, 전체적인 인상은 ‘빛으로 그린 얼굴’에 가깝다.
이 변화는 단순한 디자인 유행이 아니라, 전기차 시대의 기술적 전환이 만들어낸 미학적 결과다. 전기차는 엔진룸의 냉각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라디에이터 그릴이 줄어들고, 대신 조명이 시각적 중심을 차지하게 됐다. 헤드램프 대신 DRL이 눈 역할을 하고, 그 형상과 패턴이 곧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로 자리 잡은 것이다.
글로벌 브랜드들이 선택한 ‘빛의 언어’

현대차의 코나·투싼은 전면부 전체를 가로지르는 DRL로 미래적 이미지를 구축했고, 싼타페 신형은 ‘H’자형 시그니처 조명으로 각인을 남겼다. 프랑스 시트로엥은 로고와 라이트를 이어주는 ‘C자형 패턴’으로, 란치아는 상단 삼중 LED를 통해 자사 엠블럼의 ‘성배’ 문양을 재현했다. 유럽 제조사뿐 아니라 폭스바겐 ID.4, 쿠프라 타바스칸, 아우디 Q6 e-tron, BMW i7 등도 모두 조명 그래픽을 중심으로 브랜드의 시각 언어를 통일하고 있다.
조명은 더 이상 ‘부품’이 아니라 브랜드의 심볼과 시그니처로 기능한다. 아우디의 다이아몬드 커팅형 라이트 유닛, BMW의 보석 조명, 볼보의 ‘토르의 망치’ DRL까지 — 브랜드의 첫인상은 이제 모두 ‘빛의 형태’로 정의되고 있다.
테슬라·페라리·중국차까지, “빛이 얼굴이 되는 시대”

가장 극단적인 예는 테슬라 사이버트럭이다. 전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한 줄의 얇은 라이트바만이 존재하며, 실제 헤드램프는 범퍼 속에 감춰져 있다. 기능보다 그래픽이 우선되는 디자인이다.
페라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최근 공개된 849 테스타로사는 중앙 라이트바로 양쪽 램프를 연결해, 공기 흐름과 디자인의 상징성을 동시에 살렸다. 고성능 슈퍼카부터 패밀리 SUV까지, 브랜드와 가격대를 막론하고 모든 제조사가 “조명으로 정체성을 설계”하는 시대에 들어선 셈이다.
심지어 중국 전기차 브랜드들은 차량 외부 조명을 상황에 따라 바꾸는 ‘감정형 라이트’를 개발 중이다. 운전자의 감정, 도로 상황, 주행 모드에 따라 차량이 표정을 바꾸는 것이다.
그릴이 사라진 시대, 조명이 브랜드를 대신한다

전기차는 엔진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커다란 흡기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신 조명이 전면부의 새로운 얼굴이자 언어가 되었다. BMW의 ‘i 비전 디’ 콘셉트는 헤드램프 대신 인터랙티브 LED 패널을 적용했고, 현대차의 ‘아이오닉 5·6’은 픽셀형 조명을 통해 디지털 감성을 표현한다.
자동차의 ‘눈’이 사라진 시대, 빛은 단순한 기능을 넘어 감정과 캐릭터를 전달하는 매체가 됐다. 이제 자동차 디자인의 경쟁은 ‘빛을 어떻게 그리느냐’의 싸움이다. 브랜드는 라디에이터 그릴이 아닌 DRL의 선 하나로 정체성을 말하는 시대를 맞이했다.